자료실

강좌 교안

HOME > 자료실 > 강좌 교안

평등과 협동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회인들의 새로배움터
 
[시민강좌교안]분단과정의 이해와 한국전쟁의 결과
 작성자 : 십시일반
작성일 : 2015-07-06     조회 : 1,228  
 첨부파일 :  시민강좌150625교안.hwp (880.5K) [3] DATE : 2015-07-06 20:18:08

분단과정의 이해와 한국전쟁이 끼친 영향     

                                                             2015년 6월 25일 십시일반 강좌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주한


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탱크 소리, 6월 27일 새벽 2시 대전행 특별열차, 6월 27밤 10시~11시 이승만의 담화 방송.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근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선에서도 용감한 국군 장병들이 싸워서 오늘 아침에는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들을 추적 중이다. 국민은 군과 정부를 믿고 동요함 없이 생업에 종사하라.”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 다리 폭파, 서울시민 100만명 고립.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

2. “이승만의 자유당이야말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던 정당이었으며, 세계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불법과 부정을 꾸미고 이를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대한민국의 국민 기본법은 종이 위헤 적어 놓은 글자에 불과했으며, 자유당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일쑤였다.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은 12년 동안 농촌에 전기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면서 사치스러룬 소비 경제에 빠져, 농촌을 메말라 병들게 했다. 자유당 독재 12년 동안, 농촌의 경제는 파탄하고 관기른 문란해졌으며, 부정 축재자들은 더욱 썩어 빠져 갔다.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패거리인 자유당이 날뛰어 겨레의 장래는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1962년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

3. “일본놈 앞에서 자기 이름 바꾸고, 광복군은 씨를 말려 죽이겠다 한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생각하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대통령 자격 있어도 박정희는 자격 없다’고 했어요. 절대 실족사는 아니고 누군가 죽인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이제 진실을 밝히는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양의 탈을 쓰고 활보하는 잔당을 없애야죠.”-《한겨레》, 2012년 8월 21일

4.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를 만들어낸 원형을 1945년부터 1953년까지로 본다. 일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파가 민족주의를 일대 청산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반민특위 해산,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한국사는 극우파가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가 되었다.

5. 광복 후, 민족의 최대 과제는 일제 잔재, 곧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파는 정치․경제․문화․교육․행정․종교․언론․예술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권력을 누렸다. 민족을 배반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인 이들이 광복 후에도 여전히 그런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경찰 간부 중 80퍼센트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으며, 일제의 앞잡이로 혁혁한 공과를 세운 인물일수록 요직을 차지했다. 이에 대해 민중은 분노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친일파의 온갖 탄압과 방해공작을 뚫고 1948년 10월 23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발족시켰다.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은 반민특위 해체를 위해 반민특위회 위원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등 집요한 방해공작을 펼쳤다.
6. 친일파가 정권 기반이었던 이승만은 처음부터 반민법에 적대적이었다. 이승만이 국민들에 의해 쫓겨난 한국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그는 반민법 초안이 국회에서 완성되어가던 1948년 9월 3일, 담화를 발표했다.

“지금 국회에서 친일파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마치 조선총독의 담화 같다.

7. 반민특위 활동이 여론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자 이승만은 1949년 2월 15일, 반민법 개정을 선언한다. 반민특위는 2월 17일, 〈반민법을 방해하는 대통령 담화를 반박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항상 반민법 운영과 치안의 책임을 특위에 전가시키려는 듯하나 국민은 속지 않는다. 반민법이 공포된 뒤에도, 윤 내무장관 재직 시에 악질경찰관을 요직에 등용하였음은 대통령의 지시였던가. 진정한 애국 애족으로 불타는 경찰관은 반민자 처단으로 인하여 더욱 단결되고 치안을 확보할 수 있다. 2, 3인이 자의로 사람을 잡아다가 난타 고문 운운하였으니, 이야말로 언어도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매일같이 수십 명이 특위를 방문하여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님, 내 동생, 내 자식, 내 민족의 원수를 최고형으로 단죄하여 달라는 피눈물 섞인 호소를 대통령은 듣고 있는가. 대통령은 권력으로 정의를 억압하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신성한 헌법과 3천만의 지지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바이다.“

국민은 그의 말에 속지 않았다. 민족의 원수를 최고형으로 단죄해달라는 피눈물 섞인 호소를 대통령은 듣고 있었을까. 위의 문장은 이승만이 어떤 인물이고 당시 민중이 무엇을 원했는지 잘 보여주는 1차 사료다.

8. 2월 2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대통령 산하에 두고, 반민족 행위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에서 개정안이 폐기되고,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친일파는 사활을 걸고 저항했다. 이들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그래서 1949년 5월 17일에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벌어진다. 국회의 소장파 의원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공세였다.
1949년 6월 6일 일요일 새벽 7시, 무장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한다. 체포된 특위 위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프랑스로 치면 나치 동조자를 처단하던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격이다. 6월 26일에는 소장파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백범 김구가 암살된다. 7월 6일 국회는 공소 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켜 1950년 6월 20일이었던 반민법 공소시효 기간을 1949년 8월 31일로 단축시켰으며, 반민족행위자 청산은 종료된다. 반민족 범죄 행위자 처벌은 7명이 1년도 안 되는 징역을 살고 나온 것으로 막을 내렸다.

9.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한국판 나치 협력자’라고 말할 수 있는 친일파에게 완전히 면죄부를 줌으로써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드골은 나치 독일에 협력한 배반자들을 ‘외세와 내통한 이적 죄’와 ‘간접죄’를 적용해 대담하고도 대단히 가혹하게 심판하고 처벌하였다. 그리고 반 나치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좌우파 정치인과 애국적 시민들만으로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해 2차 세계대전 후 민주적인 프랑스국가를 건설했다. 드골은 주체세력에 이념문제를 크게 우려하지 않았고 좌파든 우파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세력을 총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나치 협력자들의 재등장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은 드골과는 반대로 해방 후 새로운 한국건설의 주체 세력의 주류로 친일파를 재등용했다. 친일파는 이승만의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조직적으로 제거했고 탄압도 불사했다. 많은 독립운동인사들은 공산당으로 낙인찍혀 일제보다 더 가혹한 탄압을 받거나 감옥에 처넣어졌다.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04, 360~362쪽

10. 광복 후, 이승만의 선택은 친일파였으며, 이는 한국현대사를 규정했다. 이승만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단재가 회의장을 나오면서 한 말에는 시대를 통찰하는 혜안이 들어 있다.

“미국에 들어앉아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11. 광복된 세상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청산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역사관과 역사학도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졌다. 이병도가 주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문명의 발생                            선사시대의 문화권


11. “한반도는 아시아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육교의 구실을 해왔다. 이와 같은 위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민족은 일찍부터 중국에서 각종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일본으로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양쪽에서 압력과 도전을 끊임없이 받았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켜 왔다. 한반도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산이 많다. 한민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올 수 있었던 까닭은 일찍이 이러한 한반도를 차지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한민족의 정체성과 잠재력은 한반도에서 형성되었다.” - 국사편찬위원회,『신편한국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반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아시아대륙과 접해있으며, 일본열도와 아시아대륙 사이에서 육교의 구실을 해왔다. 이러한 위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민족은 양쪽에서 압력과 도전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러나 벌판이 넓은 만주와는 달리 산이 많은 한반도를 차지하여 정체성을 지켜올 수 있었다.” - 국사편찬위원회,『신편한국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반도라는 좁은 지역에서 진행된 한민족의 살아남기는 역경의 극복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역동’의 한국을 있게 한 근원이라는 점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태진,『새한국사』, 까치, 2012, 8쪽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지  청동기시대의 유적지          여러나라의 성장
12.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론’을 내세운 미지나 쇼우에이(三品彰英)가 『조선사개설』에서 한 말이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이 부수된 이 반도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의 여파를 입음과 동시에, 또한 주변적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의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은 고대의 복현(復現)이다. 이는 앞으로 영원히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예속을 주장할 수 있는 정신을 인도해준다.”

13.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 보장.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하였고,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회동.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 합의. 요동치는 정국. 1947년 9월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 남한만의 선거.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

14. 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 9월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들이 승인. 분단 공식화. 국경선 형성. 김일성정권,1949년 10월 중국공산화,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D.G.)미국무장관의 성명, 1949년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Stalin,I.V.)의 승인.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른 남한 내 혁명 가능성이 희박, 박헌영(朴憲永)을 누르는 정책, 남한의 정치·경제적 혼란상태, 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

15. 미국의 최강국 지위. 미국과 소련의 냉전. 강력한 반공정책. 중국의 상승. 모택동체제강화, 일본의 화려한 부활, 베트남전, 남북한을 합친 한국인 인명 손실 520만 명. 이산가족.인적 손실과 함께 지적해야 할 점은 방대한 규모의 이산가족의 발생이다. 남북한의 사회 및 경제 기반이 파괴 북한 1949년과 비교할 때 광업생산력의 80%와 공업생산력의 60% 및 농업생산력의 78%가 감소했다. 더 큰 문제는 적대적 대립. 이승만체제. 미국의 경제원조. 현재의 경제시스템의 뿌리.

16. 10년 후 통일_한반도의 미래, 지승호가 묻고 정동영이 답하다
지 ▷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하이라이트의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답변을 받아낸 거죠?

정 ▷ 맞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처음 나왔고 그 뒤 북핵 협상에서도 하나의 기준선이 됩니다. 하지만 쉽게 나온 발어는 아니었어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북의 궁극적 목표가 핵 보유 국가가 되는 것입니까.” 김 위원장 답이 “그렇지 않소.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면서 우리를 압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핵을 개발하는 것이지 미국이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소.” 내가 또 물었어요. “그러나 전 세계인들은 김 위원장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론에 대해 김 위원장은 완강하게 답했어요 “그렇지 않소. 미국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핵을 한 알도, 한 알도 가질 필요가 없소. 와서 다 보라고 하겠소.” 그는 핵탄두를 알이라고 표현했어요. 다시 반론을 했지요. “평양 오기 전에 국회에 나갔는데 야당 의원들이 그랬습니다. 통일부 장관이 순진하다고. 김정일은 절대로 핵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때 김 위원장 얼굴이 상기되는 듯했어요. 그러더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내 기억에 북핵 위기가 발생한 이후 십수 년 동안 북한 당국이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핵에 매달리는 이유가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최상급 어법으로 강조한 것이었지요. 김 주석은 북에서는 신과 동급 아닙니까.(웃음)

지 ▷ “평화가 커지면 시장도 커진다.”는 것이 평소에 하시는 말씀인데요. 개성공단도 그런 거잖습니까? 시장이 커지면 평화도 커지고, 그렇게 선순환되는 걸 텐데요. 평화 체제가 되면 우리 발언권도 커지겠지요. 
정 ▷ 맞습니다. 상상해보면 우리 발언권이 엄청나게 커지는 것입니다. 일본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같은 문제도 갈라져 있으니까 힘이 안 실리는 거예요. 한반도 평화 체제로 가게 되면 독도 문제 같은 경우 일본이 우리를 함부로 못 대하게 되죠. 힘의 관계가 대등해지고, 그러면 중국도 우리를 존중하게 됩니다. 북한은 자기 품에 있고, 남한은 동생 다루듯 하는것이 아니라. 그건 국토나 인구 크기 문제가 아니죠. 미국에게도 우리가 얼마나 더 중요해지겠습니까? 친중 노선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더 신경도 쓸 것이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주독립 국가가 되는 것이죠. 작전권도 없지, 분단되어 있지, 우리는 사는 데 불편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굴욕적인 것은 지금의 상황 아닙니까.

지 ▷ 통일되면 주변국에서 한국의 눈치를 좀 더 보겠죠.

정 ▷ 구한말부터 포함해서 100년 이상 온전한 자주독립국에서 살아 보지 못했어요.

작전권 없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뿐

지 ▷ 2015년으로 다가온 전시 작전권 환수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한번 연기했고, 2015년에서 또 한 번 연기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들이 있는데요.

정 ▷ 장군들이 당당하지 못해요. 오히려 더 자주적이고 당당해야 할 군 지도부가 어찌 그렇게 강대국 의존적인지 안타깝습니다. 남북 간에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예요.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세계8강입니다. 경제 총량은 1조 달러를 넘어서 실질적으로는 북한에 비해 덩치가 100배도 더 큽니다. 북한에게 동맹국이었던 소련은 해체됐고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변해버렸어요. 군사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나라예요. 전 세계를 둘러봐도 자주독립 국가 가운데 제 나라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못 가진 나라는 한국 말고는 없습니다. 심지어 전범 국가였던 일본의 자위대도 일본 정부가 지휘권을 갖고 있어요.

17.“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부터 혁명해야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준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와 관계없는 일로 여기지 않는다”를 평생 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 온정 없는 세상의 온정, 영혼 없는 세상의 영혼”이라며  긍정적인 측면도 함께 보았다. 마르크스가 가장 경계한 것은 빈곤이 아니라 ‘노예’였다.

18.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