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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의1] 인류는 왜 정의를 지향해 왔을까 (12년 7월)
 작성자 : 십시일반
작성일 : 2012-08-15     조회 : 956  



 
 
대표 한상우
 

 
현재의 세상은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전부터도 ‘정의’는 철학의 중요한 화두였다. 만약 그 당시 사회가 공정하고 평등했다면, 정의가 화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부르짖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한국 사회는 어찌 보면 불의가 판을 치는, 정의가 그리운 사회일지 모르겠다.
 
술자리에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테러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명분이야 어떻든 일체의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입장과 식민지라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저항행위라는 입장이 충돌했다. 토론은 이어 한국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를 향해 폭력을 포함한 저항 행위를 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는 주장과 이 역시 폭력에는 반대한다는 주장으로 확전되었다. 토론 내내 각각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어느 것이 더 정의로운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상대 주장이 틀렸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각각에게는 나름의 정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토론은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정의(正義)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개념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은 사람이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말하지만, ‘올바른’의 기준은 참으로 애매하다. 철학에서도 오랜 동안 화두가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이들을 납득할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있었다. 각각에게는 조국과 동포들의 행복이라는 ‘정의’가 있기에, 그들은 목숨 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각자 명예롭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둘 모두가 정의로울까? 그렇다면 세상을 관통하는 정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범인을 풀어주는 부패한 상관을 믿을 수 없어, 범인을 죽이는 경찰을 다룬 영화 “더티해리” 그는 부패한 세상에 맞서, ‘정의’를 위해 총을 쏘았다. 하지만 법 절차를 밟지 않은 채, 누구나가 사적으로 죄인들을 응징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일까? 그렇다면 정의는 참으로 자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응징을 당해도 싼 나쁜 놈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그 기준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똑같은 행위를 ‘부(不)정의’로 바라본다. 이처럼 ‘정의’는 상대적이며, 개인이나 사회의 가치관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헌정 질서 유린이 어떤 이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쿠데타가 되는 것처럼. 혹은 힘이 곧 정의라는 말처럼 당시는 구국의 결단이었지만, 지금은 헌정질서 유린과 반란 행위로 평가받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경우는 한국 말고도 비일비재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처럼, 한 나라의 주권을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유린한 경우도 있다.
 
정의를 규정하는 것은 이처럼 어렵다. 그런데 뒤집어 부정의를 규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쉽다. 독립군과 일본군 중 누가 ‘부정의’ 일까. 일본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타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짓밟았으니 말이다. “더티해리”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정의로 권장할 수 없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사적보복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로 선량한 피해자가,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질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보복행위로 선량한 피해를 양산하는 문제는 미국의 세계 전쟁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인류는 항상 정의를 갈망해왔다. 불편부당한 세상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존을 위협해 왔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회만이, 인간의 존엄과 평등한 삶을 보장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자본이 지배하며, 자유라는 명분하에 경쟁을 합법화했다. 경쟁에서 이긴 자가 정의이고, 패자는 부정의이다. 그러나 게임 룰의 부정은 은폐되고, 불공정한 경쟁이 합법을 가장해 횡행한다. 그 결과 토너먼트는 승자보다 패자가 더 많이 양산되고, 이들은 재기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회의 ‘잉여’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 전체의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
 
인간은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짐승들과 맞서 싸워 이길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동 노동과 협력, 지혜의 나눔을 통해 공동체를 발전시켜 왔고, 지금의 문명을 창출할 수 있었다. 정의가 고대부터 사회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공동체의 존속이 인간 생존의 필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정의는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가능한 발전과 상관없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인류의 보편적 이익이 아닌 특정 공동체만의 이익이 정의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정의가 없는 인간관계는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의 왕국과 다르게 인류의 진화가 아닌 후퇴를 불러올 뿐이다. 인류가 진화시켜온 세상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최소한 4시간의 노동만으로도 인류가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세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부정의한 세상은 여전히 빈곤과 절망이 다수다.
 
이제 다시금 ‘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정의는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정의가 만화나 영화 속의 히어로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유물이 될 때 우리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