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월간 도르라미

HOME > 자료실 > 월간 도르라미

평등과 협동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회인들의 새로배움터
 
[여는글] 작은변화로부터...(12년6월)
 작성자 : 십시일반
작성일 : 2012-07-07     조회 : 605  

작은 변화로부터...
 
 
 
연대국장 나선영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가장 즐겁고 보람된 마음이 들 때는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이다. 사회복지사가 노력해도 지원에 한계가 있는 만큼, 당사자들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될 때 즐거운 마음이 든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인 나는 직업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주로 만난다. 소위 쥐뿔도 없는... 그러니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만나면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세상과 부딪치며 가졌던 마음의 상처가 가득하고, 수십년간 가져온 자신의 원칙이나 경험들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어느덧 그들에게 변화를 기대하는 순수한 마음보다는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찾아 제공하고, 친근한 웃음을 보이며, 주어진 상황에서 놀고 있지는 않다며 내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고, 직업적 한계라며 합리화를 하며 지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한 할아버지를 통해 자존감의 중요성과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사람 사는 냄새를 즐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고단했던 과거를 혼자 힘으로 짊어지고 살아오신 전형적인 우리 사회의 어른들 모습이셨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무척이나 어렵게 성장하였지만, 누구보다 성실하셨다. 그 성실함 하나로 산동네지만 한때는 작은 양은 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고물과 파지를 수거하며 생계를 유지해 오셨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씩 저축하는 성실한 삶은 여전했다. 하지만 자식들은 험한 세상에 혼자 맞서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그렇듯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과 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도 많았다. 큰 아들은 가출해 집과 왕래를 끊었고, 작은 아들은 사업을 한다고 아버지의 인감을 이용해 경제적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분열정동장애라는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다. 할아버지 역시 이런 아들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다. 그래서 자꾸 술을 드시게 되었고, 술에 취하시면 할머니와 작은 아들에게 폭언을 하게 되었다.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자식들까지 당신의 속을 썩인다며, 술에게서 위안을 찾았던 것이었다. 고단한 삶에 성실함으로 모아둔 돈 마저 모두 잃게 되었고, 자식들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고 생각하셨으니 그 현실이 오죽 답답하셨겠는가.
 
 할아버지에게는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지지를 통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속감을 통해 삶의 의욕을 찾으면, 마음의 응어리도 풀리고, 좀 더 밝은 마음으로 가족을 바라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셔야 하는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부탁을 드렸다. 할아버지는 밑반찬을 지원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댁이 멀지 않기에 본인의 밑반찬을 직접 가지러 복지관으로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더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몇 차례 복지관 방문을 하시던 할아버지께 조심스럽게 가시는 길에 가까운 곳의 몸이 불편해서 직접 오시지 못하는 어르신들 밑반찬도 배달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밑반찬 서비스를 받으시던 입장에서 다른 봉사자들을 보면 늘 훌륭해 보이고 고마웠던 마음이 있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렇게 밑반찬 봉사활동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봉사를 하시겠다며 복지관에 오셨고, 그냥 돌려보낸 날이 있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봉사활동이 싫으신데, 복지관에서 부탁한 일이라 마지못해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친구의 죽음으로 속상한 마음으로 술을 늦게까지 드셨고, 그래도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술이 덜 깼지만 복지관으로 오신 것이었다. 할아버지께 반찬 봉사를 받으시는 분들이 사랑을 받으시는 마음으로 밑반찬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과 할아버지가 행여나 넘어져 다치실까 걱정이 되어 음주를 하신 할아버지께 일을 맡길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미안하다 하시며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계속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시고 있다. 그렇지만 작은 변화의 모습으로 최소한 봉사활동 전날은 술을 드시지 않는다. 조금이지만 드시던 술의 양이 줄고 봉사활동을 통해 당신의 삶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 할아버지는, 손수 봉사활동을 위한 작은 수레까지 만들고 눈이오나 비가 오나 묵묵하게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우연인지 자식들과의 갈등도 줄었다. 자녀들과 왕래를 하며 가족관계가 좋아지고 있고, 할아버지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음을 지으시며 인사를 해 주신다.
 
 나이 드신 분들일수록 살아오던 습관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소한 계기를 통해 자존감을 되찾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누구나 타인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또 다른 타인들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것이 돌다가 내게도 큰 힘을 주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작은 변화가 할아버지 당신 스스로는 물론, 당신의 가족과 나에게도 긍정의 힘을 주는 계기가 된 것처럼. 그래서 세상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