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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활동을 다녀오면 왜 계속 후회가 들까요?
 작성자 : 마다미
작성일 : 2012-05-26     조회 : 1,774  

오늘도 자원활동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봉사활동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저는 그것 보다는 자원활동이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봉사는 무슨, 지들 좋으라고 하면서" ㅋㅋ 이런 생각입니다.
노인요양원을 다니다가 보육원으로 옮기고 오늘로 세번째, 애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3년을 다닌 노인 요양원 보다 활동 시간은 두배 이상으로 줄었는데,
고되기는 배 이상인 것 같습니다.
또 끝나고 나도 노인요양원처럼 가뿐한 마음이 아니라,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며칠씩 무거운 마음이 지속됩니다. 참으로 환장할 노릇입니다.
두번째때부터 들기 시작한 마음인데,
처음에는 말을 잘 안듣는 애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그 다음에는 아무래도 제가 잘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몸도 고되고, 마음도 고되고...
그러다 인터넷을 하다 제 무거운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얼핏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게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조금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기사를 읽으며 이게 당연하고 상식적인 삶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코 끝이 찡해졌습니다....
상식이라고 주장하면서 막상 그렇게 못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고,
그 힘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느껴졌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참으로 자원 활동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저를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낍니다.
 
이 기사 다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주소를 옮기는 것을 할 줄 몰라, 원본을 그대로 옮깁니다.
 
 
***부모 잃은 남매 12년 거둔 그분에게...*****
 
 
지난 2000년, 1교시 무용 시간.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맞는 무용 시간이라 설렘이 일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교실 문을 막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렸다. 담임선생님이 서 계셨다. 선생님 어깨너머로 친척 언니가 보였다.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라, 언니가 학교에 무슨 일이야?"

"어, 그래... 미안한데 영미야, 언니랑 지금 어디 가야할 것 같아..."

"응?"

무슨 일인지 말도 않고 다짜고짜 어딜 가야 한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언니를 대신해 담임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영미야... 놀라지 말고 들으렴. 아버지가 아침에 돌아가셨다는구나."

"..."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르던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떨리는 몸을 이끌고 언니와 힘겹게 교실 문을 나섰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때 내 나이 17살. 남동생은 이미 장례식장에 도착해 있었다.
 
"불쌍한 자식들 눈에 밟혀 어떻게 저 세상으로 가나..."

친척들은 장례식장이 떠나갈 듯이 울고 있었다. 9남매의 넷째셨던 아버지. 아침에 학교 갈 때 들었던 "아빠 일 갔다 올게"라는 말은 당신의 유언이 돼버렸다.

장례식이 끝나자 남겨진 것은 우리 남매뿐이었다. 아빠와 함께 "가족"이라고 불렸던 계모(새어머니라는 표현은 쓰기 싫다)는 재산을 모두 정리한 채 떠나버렸다. 계모는 그나마 양심이 있었는지 우리 남매에게 700만 원을 남겨놨다. 그 돈으로 친척들은 우리 남매에게 영구 임대아파트를 구해줬다.

5평 짜리 방에서 산 5명의 가족

세상에 정말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은 그제서야 흐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무서웠다. 살아갈 자신도, 의지도 없었다. 그때, 우리 손을 잡아준 건 "고모"였다.

"고모가 밥은 안 굶길테니 고모랑 살자. 민이랑 아름이도 니그들 좋아하니 잘 됐구먼."
 
일찍 홀로되신 고모는 해장국집을 운영하시면서 남매(민이와 아름이)를 키우고 계셨다. 고모는 가게 딸린 방에서 생활하는 터라 우리를 거둘 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 둘에게 함께 살자고 말씀하셨다.

고모는 그런 분이셨다. 고모의 말에 우리 남매는 뛸 듯이 기뻤다.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집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고모네 가게로 향했다. 고모가 해주는 콩나물국밥이며, 감자탕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고모는 가게 앞에 조그마한 호떡집도 운영하셨다. 장사가 잘돼서 어묵이랑 튀김까지 파셨다. 계모 밑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우리 남매는 고모 덕분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해질녘까지 놀고, 고모가 차려준 밥상 앞에 모여 오순도순 밥을 먹는 일상은 행복 그 자체였다. 우리 남매만 살았던 아파트는 가지 않았다. 5평 남짓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다섯 식구 모두 함께 잤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였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 고모는 그냥 져주셨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고모랑 살면서 부모의 사랑이 뭔지 배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사랑인지 몰랐다.
 
고모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나서 3~4개월이 지났다. 당시 나는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에 고모한테 대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말 않고 한 달 정도 지낸 적도 있다. 밥도 안 먹고, 용돈도 달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기도 했다. 내게 있어서는 그게 반항의 전부였지만, 고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갑갑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당신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면 좀 덜했을까. 혼자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카를 고모는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백기를 들어주신 것이다.
 
"야, 니가 이겼다. 그러니 밥 묵어.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밥 묵고 이따 저녁에 통닭 사줄게. 그것도 애들이랑 묵어."

그때 나는 도대체 누굴 이겨 먹고 싶었던 걸까. 아니 이겨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돌이켜보면 그저 고모의 관심이 필요했던 것 같다.
 
고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2004년께 순둥이였던 남동생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학교를 장기간 무단결석하는 사고를 쳤다. 학교에 불려간 고모는 연신 굽실거리며 동생의 담임선생님께 선처를 부탁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당신 자식 키우는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같은 사랑을 주시는구나." 그리고 느꼈다. 나에게도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사고 치는 자식들 때문에 소주 한 잔 걸치시다가도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힘차게 일을 나가시는 고모. 그런 고모를 보면서 나도 조금씩 성장해 갔다.

소싯적, 배드민턴 국가대표를 꿈꿨던 고모는 전직 운동선수답게 "대장부"에 가까운 외모를 갖고 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후덕한 몸, 뒤에서 보면 마치 남자 같다. 성격 또한 강단지고 대범해 쉽게 주눅 드는 법이 없다. 네 자식을 키워야 하는 고모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생존법이었을 것이다.
 
평소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 곳곳을 주름 잡는 고모는 특유의 넉살과 훈훈한 인심으로 사람 좋기로 소문난 분이다. 보는 사람마다 "우리 자식들이 넷인데 하나같이 예뻐요, 나 안 닮아서 천만다행이지"라며 매번 자식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고모는 그렇게 한없이 사랑만 주실 것 같다가도 매몰찰 때는 마치 시베리아 날씨처럼 차갑과 냉정했다.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던 조카를 변화시키기 위한 고모만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동사무소 가서 증명서 하나 발급해 오는 것도 고모는 그냥 해주지 않으셨다. 밖에서 기다린다며 내가 떼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때는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가 물고기를 잡아 준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나를 4년제 대학에 보낸 고모는 지금도 식당일을 계속한다. 경기 불황이 계속돼 이전에 하던 해장국집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지금은 병원 조리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도 자식 자랑은 끊이질 않는다. 자식들 중 한 명이라도 조리실을 찾으면 목소리 톤부터 달라진다. 나는 그곳에서 "조카자식"이 아니다. "큰 딸내미"다.

"우리 큰 딸내미 밥 먹고 가. 너 좋아하는 파래무침 있다."
 
뭐 잘난게 있다고 저렇게 좋아하실까. 그런 고모를 위해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난생처음 꽃바구니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적어 보냈다.
 
"어버이보다 위대한 사랑과 헌신 감사합니다. 큰딸 올림"

조리실에서 꽃바구니를 받은 고모는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야, 뻥순이. 순전 뻥순이고만. 평소에 쫌 잘 하시지! 암튼 큰 딸내미 고맙다. 난생 처음 꽃이라는 것도 다 받아보고... (고모는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하셨다) 야~ 그래도 다음엔 돈 아까우니까 이런 거 사지 마러. 차라리 돈으로 줘."

역시 고모다. 낯 뜨거운 멘트는 고모 성격상 입에 맞질 않는다. 나는 이젠 눈 감고도 고모의 진심을 알 수 있다. 12년 넘게 살아온 "모녀지간"이기 때문이다.

새벽 5시. 동이 트기 전에 고모는 출근한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식재료를 준비한다. 20년 넘게 식당일을 해온 고모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지 몸에는 파스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쉬지 않고 일터로 향하는 고모는 "새끼들이 넷이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술기운을 빌려 말씀하신다. 그런 고모에게 오늘은 제일 좋아하는 순댓국밥에 소주 한 잔을 사드리려고 한다. 그리고 술기운을 빌려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고모, 이젠 엄마라고 부를게요."